[2] 입증책임의 분배 이야기 민법 속의 민사소송법(2003)

 

[2] 입증책임의 분배 이야기



Ⅰ. 들어가며

 1. 입증책임의 의의

 증명을 요하는 사실(요증사실)의 존재 여부에 대해 증거조사를 거쳤으나 그 사실이 결국은 진위불명인 경우에, 판결시에 그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받게 되는 당사자 일방의 위험 또는 불이익을 객관적 입증책임이라 한다. 보통 입증책임이라고 할 때는 객관적 입증책임을 뜻한다.

 법규정은 법률요건과 법률효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사자가 어떤 법률효과(예컨대, 매매에 기한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발생시키는 법률요건에 해당하는 사실(매매계약 체결사실 등)을 주장·증명해야 한다. 그 사실의 존재 여부가 불확실한 경우에는 그 사실이 없는 것으로 취급되어 결국 일방 당사자는 그에 따른 법률효과마저 부인당하게 되는데, 일방 당사자가 입는 위와 같은 불이익을 객관적 입증책임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는 형사소송법에서의 ‘거증책임’개념에 대응한다.

 2. 주관적 입증책임과의 구별

 당사자는 위와 같은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주장사실에 대해 증거를 제출하고 증명활동을 해야 할 현실적 필요가 있는데, 이를 주관적 입증책임이라 한다. 객관적 입증책임이 결과(적으로 부담하는)책임이라면, 주관적 입증책임은 행위(를 해야 할)책임이다. 증거를 제출해야 할 책임이라는 의미에서 증거제출책임이라고도 한다. 이는 형사소송법에서 ‘입증의 부담’이라는 개념에 대응한다.

 3. 입증책임의 기능

 ① 어떤 사실이 진위불명이라고 해서 법원이 재판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재판을 가능케 하며 ② 청구원인(원고책임)과 항변(피고책임)의 구별기준이 되고 ③ 항변(피고책임)과 부인(원고책임)의 구별기준이 되며 ④ 본증(자신에 책임)과 반증(상대방에 책임)의 구별기준이 되고 ⑤ 또한 당사자들이 증거를 대지 않고 있을 때, 법원이 누구에게 입증을 촉구할 것인가의 기준이 된다.

 4. 입증책임규정의 법적 성질(소속 법영역)

 이에 대해서는 실체법설과 적용영역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①실체법설(강·이·김용)은 입증책임규정이 재판규범으로서 본안판결의 내용을 정하기 때문에 실체법규라는 견해이고 ②적용영역설(김홍·송)은 요증사실이 실체법상의 규정에 대한 법률요건을 이루고 있는 경우에는 실체법에 속하고, 요증사실이 소송법상의 규정에 대한 법률요건을 이루고 있는 경우에는 소송법에 속한다는 견해이다.


Ⅱ. 입증책임의 분배기준

 1. 법률요건분류설(규범설)

 (1) 내용

 법률요건에 해당하는 사실이 진위불명인 경우 법률규정의 부적용에 의한 불이익은, 당해 법률규정의 적용을 통해 어떤 법률효과의 인정을 바라는 당사자에게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어떤 법률규정의 요건사실이 진위불명인 경우에 각 당사자는 자기에게 ‘유리한’ 법규의 요건사실에 대해 입증책임을 부담한다고 보는 견해로 통설과 판례의 원칙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2) 문제점

 현대형소송 즉, 공해·환경소송, 제조물책임소송, 의료과오소송 등에 있어서는 법률요건분류설을 그대로 관철시키면 아주 부당한 결과를 낳게 된다. 특히 불법행위책임을 추궁하는 경우에 피해자가 가해자의 고의·과실, 인과관계 등에 대해 입증책임을 부담하게 되는데 비해, 거의 모든 증거(예컨대 진료기록부)는 가해자측에 존재하므로, 피해자는 입증의 곤란에 부딪치게 된다(증거의 구조적 편재).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민사소송법학의 전반에 걸쳐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2. 법률요건분류설에 대한 비판적 견해

 (1) 위험영역설

 위험영역이란 자기의 지배 아래 위험을 발생시킬 수 있는 사실상·법률상의 수단을 갖고 있는 사실적 생활영역을 말하는데, 피해자는 손해의 원인이 가해자의 위험영역 내에서 발생한 것을 입증하면 족하며, 가해자가 손해발생의 주관적·객관적 요건의 부존재를 입증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현대형소송에 있어서 당사자 간의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의식이다.

 (2) 증거거리설(이익형량설)

 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를 보유하기 쉬운 입장에 있는 당사자(증거와의 거리가 가까운 당사자)가 그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으로, 규범의 구조 대신에 실질적 이익형량을 분배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견해이다. 이익형량의 요소는 증거와의 거리, 입증의 난이도, 실체법의 입법취지 등이다.

 3. 법률요건분류설의 문제점 극복 방안

 위험영역의 한계의 모호성, 증거거리가 동등한 경우의 이익형량의 곤란성 때문에 위의 견해들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며, 법률요건분류설의 기본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즉, 법률요건분류설을 수정·보충하는 원리로서 위의 비판적 견해들을 수용하거나(수정법률요건분류설), 입증책임을 완화·경감하는 방법(일응의 추정과 간접반증이론의 활용), 증거개시제도의 도입, 모색적 입증의 수용, 포괄적 사안해명의무의 인정 등이 그러한 시도이다.


Ⅲ. 법률요건분류설에 따른 구체적 분배

 1. 소송요건사실

 소송요건은 법원의 조사·판단을 위해 당사자의 이의를 요하는가 여부를 기준으로 직권조사사항(예컨대 당사자능력의 존부)과 항변사항(예컨대 관할권의 존부)으로 나뉜다. 직권조사사항의 부존재시에는 원고가 소각하의 재판을 받게 되므로, 원고가 소송요건의 구비에 대해 입증책임을 부담한다. 그러나 항변사항에 대해서는 피고의 주장을 기다려 판단해야 하므로, 피고가 입증책임을 부담한다.

 2. 실체법상의 법률요건사실

 (1) 권리발생사실(권리근거규정의 요건사실)

 권리(법률효과)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은 권리발생사실(권리근거규정의 요건사실)에 대해 입증책임을 부담하므로, 소비대차계약에 기한 대여금채권을 주장하는 자는 소비대차계약의 성립사실을 입증해야 하고,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주장하는 자는 불법행위의 성립요건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2) 항변사실(반대규정의 요건사실)

 권리의 발생을 주장하는 당사자의 상대방 당사자는 권리가 불발생했다거나(권리장애규정의 요건사실-예컨대, 불공정한 법률행위에 해당하는 사실), 권리가 발생했으나 소멸했다거나(권리멸각규정의 요건사실-예컨대, 소멸시효가 완성된 사실·취소나 해제된 사실), 권리가 존재하나 행사할 수 없다는(권리저지규정의 요건사실-예컨대, 동시이행항변권의 존재 사실) 것을 주장·입증해야 한다. 이러한 규정을 반대규정이라고 하며, 반대규정의 요건에 해당하는 사실을 항변사실이라고 한다.   

 (3) 권리근거규정과 권리장애규정의 관계

 권리장애규정은 권리근거규정의 요건이 충족됨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권리의 발생을 방해하는 사유에 대해 규정한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원칙규정과 예외규정의 관계에 있으며, 주로 본문과 단서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즉 매매계약이 성립하면 원칙적으로 재산권의 이전청구권과 매매대금지급청구권이 발생하지만(민법 제563조), 예외적으로 매매계약이 통정허위표시(동법 제108조)에 해당한다거나 선량한 풍속에 위반(동법 제103조)한 것이라면 매매계약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아 위의 권리들은 발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4) 소극적 확인소송의 경우

 보통은 원고가 권리의 존재를 주장하고 피고가 그에 대해 다투므로, 원고가 권리발생사실에 대해 입증책임을 지고, 피고가 항변사실에 대해 입증책임을 진다. 그러나 원고가 매매대금지급청구권 부존재확인의 소를 제기한 경우처럼 ‘소극적 확인의 소’에 있어서는, 피고가 동 권리의 존재를 주장해야 하고 입증해야 한다. 즉 보통의 경우와 입증책임이 역전된다.


Ⅳ. 조건부 법률행위의 경우

 1. 해제조건부 법률행위

 법률행위에 해제조건이 부착된 경우에는 일단 법률행위의 효력이 발생하고, 해제조건이 성취되면 법률행위의 효력이 소멸하게 된다. 따라서 법률행위의 효력이 소멸되었다고 주장하는 자가 해제조건의 존재 및 그 성취사실을 주장·입증해야 한다(물론 이는 법률행위의 성립과 애초의 효력발생에 대해서는 다툼이 없음을 전제로 한다). 

 2. 정지조건부 법률행위

 (1) 문제점

 법률행위에 정지조건이 부착된 경우에는 그 조건이 성취되어야 비로소 법률행위가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정지조건의 부착 여부가 불분명한 경우에 ‘당해 법률행위에서 발생하는 권리를 주장하는 자가 정지조건의 부존재 또는 정지조건의 성취사실을 증명해야 하는가’ 아니면 ‘상대방 당사자가 정지조건의 존재와 조건불성취사실을 증명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2) 학설과 판례의 태도

 독일에서의 논의와 달리 ‘정지조건존재사실’과 ‘조건성취사실’에 대해 일률적으로 권리주장자가 입증해야 한다거나 그 상대방 당사자가 입증해야 한다는 견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즉 양자를 구분해 ‘정지조건부착사실’ 자체는 권리장애사실로서 항변사실에 해당하고, ‘정지조건성취사실’은 권리발생사실로서 권리주장자가 입증해야 한다는 견해(김상)만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도 명의신탁계약의 정지조건부 해지에 대해 동일하게 판시한 바 있다(93.9.28. 93다20832판결).


Ⅴ. 여론-민법 제126조와 민법 제135조

 1. 민법 제126조의 ‘정당한 이유’에 대한 입증책임

 ‘권한을 넘은 표현대리’규정은 무권대리행위의 상대방이 법률효과를 ‘본인’에게 귀속시켜, 본인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도록 근거지워주는 규정이다(유권대리와 별개의 청구권규범인가는 별론으로 한다). 제125조와 제129조에서는 ‘상대방의 선의·무과실’에 대해 단서에서 규정하고 있으나, 제126조는 ‘정당한 이유’에 대해 본문에서 규정하고 있어 누가 입증책임을 부담하는가가 문제된다.

 민법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표현대리를 규율한 다른 규정(동법 제125조와 제129조)에서 ‘상대방의 선의·무과실’에 대해 본인에게 입증책임을 부여하는 것과 달리볼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제126조의 ‘정당한 이유’에 대해서도 역시 본인에게 입증책임을 부여한다.

 그러나, 법률요건분류설을 관철한다면 규정형식의 차이를 간과할 수 없게 된다. 즉, 본문에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권리근거규정의 요소로서 무권대리의 상대방에게 입증책임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대법원은 법률요건분류설에 따라 상대방에게 입증책임을 부여하고 있다(68.6.18.68다694).

 2. 민법 제135조의 ‘대리권의 증명’에 대한 입증책임

 동 규정은 상대방의 무권대리인에 대한 ‘계약이행청구권과 손해배상청구권’의 근거규정이다. 따라서 법률요건분류설의 일반원칙대로라면, 법률행위의 상대방이 ‘무권대리인의 대리권 부존재’를 주장·입증하여야 한다. 그러나 동 규정은 대리행위를 한 자(상대방 당사자)가 ‘자신의 대리권의 존재’를 증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대리행위의 상대방이 소극적 증명을 하는 것보다, 대리인이 자신의 대리권을 적극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더 용이함을 고려한 입법이며, 일종의 입증책임의 전환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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